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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Bible Story

성경연구[성경얘기]

일삶영성연구소의 모든 컨텐츠는 성경과 성경의 정신을 기초로 합니다.

'성경연구'는 성경의 각 권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떤 특징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신구약이 통합되는 부분에서는 어떤 메시지들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숨겨진 메시지에서 부터 널리 알려진 메시지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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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 ​바른 교훈에 서게 하고 & 행하게 하라

[디도(서)] 

디도서는 그레데에서 사역하는 디도에게 보내진 목회 서신입니다. 

[그레데]

그레데는 오늘날 그리스 남단에 위치한 크레타 섬이며, 위 쪽 200km 지점에는 산토리니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미노아 문명 중심지이며, 제우스의 탄생지이자 무덤이 있고, 디오니소스 숭배가 강한 섬입니다. 

 

[제도화 교회] 

디모데서와 마찬가지로 디도서 또한 제도화되고 직제화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1:5-9).

그리고 초기 바울서신은 교회를 구축하는 단계라고 한다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와 같은 서신은 안정화 단계, 그리고 목회서신은 보호하는 단계로 교회의 발전 과정을 분류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외부 압박 & 내부 압박]

교회의 보호 단계가 필요했던 이유는 외부적으로는 로마와 사회로부터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며, 내부적으로는 이단의 기승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장] 이단과 거짓 교훈

디도서에서 이단의 특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할례파(1:10) 유대주의나 영지주의 같은 세력의 특성이 보입니다(1:16). 

또한 그레데인의 부도덕함, 허탄한 이야기, 배반 등의 문제도 아주 심각해 보입니다(1:10-16).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1:11),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1:11), “엄히 꾸짖으라”(1:13) 등의 매우 강한 어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 2-3장] 바른 교훈과 실천

더 나아가 저자는 늙은 남자와 여자, 젊은 여자와 남자, 그리고 종들을 향한 목회지침을 일일히 언급하면서 ‘바른 교훈’으로 교회를 이끌도록 권면합니다(2장).

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바른 교훈과 선한 일을 실제의 삶에서 실천하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3장).

 

[짧은 생각]

말에 그치는 복음은 효용이 떨어집니다. 아니 오히려 부작용을 낳습니다. 또한 믿음을 필요이상 강조하면 행함에 등한시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구원’에 있어서 행위는 필요없지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행실’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디도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한다고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14:21에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거저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손해를 보거나 자존심 상함을 감수하고 말씀대로 실천했을 때에,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는 저희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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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 마지막 전제(Drink offering)

디모데후서는 항상 마음에 울림이 큽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순교당할 것을 예감하고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딤후 4:6). 

 

[네로황제의 기독교 박해]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곳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64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제사건으로 네로황제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다시 투옥되어, 이전에 없었던 로마의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의 상황에서 쓰여진 글로 보여집니다. 

당시 황제숭배와 혼합종교가 일반화된 그레꼬-로마 사회에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시선이 있었고, 심지어 성찬 때에 주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이유와 서로를 향해 형제자매로 호칭한다는 이유 등으로 식인종이나 근친상간 종교로 오해 받기도 해왔습니다. 

그런데 네로 박해는 사회적인 차가운 시선과 차별과 오해를 넘어서서, 자녀들이 짐승에게 물어 뜯기는 것을 부모가 봐야 했고 혹은 산채로 꽂혀서 인간 횃불로 사용되어지기도 하는 등 끔찍한 상황이었습니다. 

 

[모두 떠났을 때]

이러한 박해의 공포 등의 이유로 바울 주변의 동역자와 돕는 사람들은 떠났고(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는 것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기도 했습니다(1:8). 

데마의 경우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을 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오직 누가만이 곁에 남았다고 말합니다(4:11-12). 

 

[다가올 죽음, 마지막 전제]

바울은 위로자이신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힘겹고 괴로웠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극한의 고난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전제(drink offering)로 드려질 때가 다가왔고’(4:6),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면서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4:7). 더 나아가서 그는 ‘의의 면류관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할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4:8). 놀라운 고백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디모데후서의 이러한 상황은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3차 전도여행 복귀 중 밀레도에서 나눈 에베소 장로들의 고별장면과 오버랩됩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고백하기를 ‘성령을 통해 결박과 환난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행 20:23),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고백하며 다가올 핍박을 예감했습니다(행 20:24). 그리고 때가 차매 성령의 예언대로 로마에서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충성된 사람]

당시의 사회적 핍박을 고려한다면,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나오는 “충성된 사람”은 보통의 충성을 요하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바울이 언급하는 충성된 사람은 고난을 각오한 사람, 그리고 고난의 길임을 알고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곧이어 바울은 충성된 사람을 병사, 경기하는 자 그리고 농부로 비유합니다(2:5-13). 그가 이 세 특정한 부류를 언급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당시 로마는 병사와 로마군의 전법으로 유명했고, 디모데가 사역하고 있는 에베소는 오늘날의 올림픽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기가 있었던 곳이고, 농사는 그들의 삶의 일부였기 때문에, 디모데서 교회와 수신자들에 전해지는 이러한 병사와 경주자와 농부의 비유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며 그들은 이 비유를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적당한 헌신자가 아니라 완전한 헌신자, 즉 진정으로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 그 진수가 밀알처럼 전해지는 듯합니다. 

 

[복음 2세대를 향한 마지막 전언]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복음 2세대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을 하며, 4장 9절에서는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합니다. 아들같은 디모데와의 마지막 재회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겉옷과 가죽 종이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합니다(4:13). 겉옷은 다가올 추위를 준비하기 위함이거나 혹은 당시 겉옷은 권위를 상징하기에 권위 이양의 의미가 담겨있다고도 해석됩니다. 그리고 가죽 종이는 성경으로 추정됩니다. 

 

[특별한 인연, 마가와 누가]

1차 전도여행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바나바의 조카 마가의 문제로 인해 크게 다툰 후에 팀이 나눠졌습니다(행 15:36-41). 바울과 바나바를 갈라서게 했던 연약하고 어린 마가였는데, 세월이 지나 바울은 앙금을 털고 디모데에게 마가를 유익한 사람으로 기술하면서 그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4:11). 

인생은 지나봐야 알고, 사람도 지나봐야 알게 됩니다. 오해는 풀릴 수 있고, 사람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앞에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동역의 선물인 것 같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돕는자 그리고 추종자 모두가 떠나고 오직 누가만이 바울 곁에 남게 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뭉클해집니다(4:12).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와의 인연도 특별해 보입니다.

누가는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울과 전도여행을 함께 한 신실한 동역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6장 10절부터 “우리”라는 인칭대명사 사용). 그리고 지금까지 옆에 든든하게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누가는 신약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나와 맞지 않는 상황에 처했을 때에 내가 그것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또 그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렸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바울과 마가와 누가 모두는 서로 모양이 다르지만, 이들의 동역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숭고하게 붙잡고 고난을 함께 견디고 인내했으며, 서로 지지하고 사랑하는 충성된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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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더 성숙한 교회'를 향해

[목회서신]

디모데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리더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 개인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 면에 있어서 목회적인 부분이많이 포함하고 있기에 목회서신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디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 & 바울의 관계]

디모데는 본래 유대인 어머니의 가정에서 자라나서 유대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행 16:1). 사도행전을 보면 디모데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부터 그 이름이 등장하지만, 여러 성경을 비교해 보면 1차 전도 여행 때에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 14장; 딤후 3:10-11).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이자 동료이지만(고후 1:19; 행 17:14-15; 18:5 외) 디모데서에서 바울은 그를 ‘아들’이라 부릅니다(딤전1:2, 8; 빌 2:22). 실제로 당시 사회관습으로 보아 디모데는 30세 이하로 예상됩니다. 

 

사도행전과 다른 서신서들을 볼 때에, 디모데는 바울에게 다양한 선교 임무를 받고 파송되는 등 바울에게 꽤나 신임을 받는 리더였습니다(고전 4:17; 16:10; 빌 2:19, 23; 살전 3:2, 6). 

 

[복음 2세대] 

어떤 학자들은 64년 로마 대화재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복음 1세대가 네로황제에게 처형당한 후 복음 2세대가 일어났는데 그 중 한 명이 디모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조직화된 교회]

그리고 디모데서는 바울서신 후기의 교회 모습이 보이는데, 바로 교회의 감독과 장로 등의 직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이 회심하고 30여 년이 지난 후의 모습이기에 초대교회는 점점 모양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의 내용은 교회 목회에 관한 다양한 권고가 대부분입니다.

 

[내용]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독교는 혼합종교와 유대주의와의 충돌이 이어졌는데 후기 바울 사역 때에도 여전히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1장에서 “다른 교훈”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그런 부류로 보여집니다. 3-4장에서도 영지주의자와 금욕주의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3:14-16; 4:10).

 

2장에서는 남자들의 다툼과 여자들의 복장 및 가르침에 대해 다룹니다. 

먼저 여성의 복장의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2장 9절에서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결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라고 언급합니다. 이는 부유층의 사치스런 복장 혹은 아데미 신전 사제들의 복장류를 언급하고 있다고도 해석하며, 다른 쪽 학자들은 일반적인 여성의 복장으로도 해석합니다. 

2장 11-12절에서는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조용할지니라”라고 권고합니다. 이 또한 특정 여성(ESV는 여자를 a woman으로, 주관하는 것은 authentein으로 해석)에 대한 해석과 일반적 여인에 대한 해석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3장은 감독과 집사의 직분에 대하여, 4장은 교회 내의 거짓말 하는 자들에 대하여, 5장은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지침을 주고있습니다. 그리고 6장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짧은 생각]

디모데에게는 어른이자 아버지이자 하늘과 같았던 바울이 사역했던 곳에서 바울의 뒤를 이어 사역해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그가 감당해야 했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얼마나 험난하고 어려운 상황들을 마주해야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고 중보해야 하며, 때로는 아끼는 마음을 담아 권면하거나 멀리서 중보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곳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그런 모습이라면 본이 되는 교회일 것입니다. 반면 여전히 어려움이 있고 아픔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더 성숙한 동역 관계의 교회로, 더 성숙한 교회로, 그리고 성령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모든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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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 종말론을 대하는 건강한 태도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주제는 서로 많이 다른 것에 비해,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내용면에서 많이 중복됩니다. 아마도 2차 전도여행 중고린도에 머물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낸 먼저의 서신(전서)의 효과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후서를 보낸 것으로 보여집니다. 

 

[주제]

데살로니가후서의 주요 주제는 박해와 종말 그리고 게으름의 문제입니다. 

 

[여전히 박해 상황]

데살로니가 교회는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기존의 다신 종교의 여러 제의 활동을 버리고 기독교가 가르치는 제의를 따랐기 때문에 더욱 주변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박해 상황은 후서 기록 당시에도 지속되었고 좀 더 구체적입니다(살후 1:3-5). 

 

돌아보면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의 역사가 있습니다. 유교문화에 따라 제사를 지내다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제사 대신 새로운형태의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한 대가는 말할 수 없는 따가운 시선과 차별 그리고 투옥과 순교였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회로부터 겪었을 어려운 일들이 짐작됩니다. 

 

[종말의 오해]

종말론의 경우 전서에서 바울은 믿음을 가진 후에 죽은 성도들의 구원과 육체의 부활 문제에 대해 답을 해주었습니다(살전 4:16-18; 5:1-3; 5:10; 1:9-10). 

그럼에도 여전히 종말이 임박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종말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말론 문제로 공황 상태에 빠진 데살로니가 교회에 잘못된 종말론에 현혹되지 말라고 강조하며, 임박한 종말에 대한전조 증상까지 설명합니다(2:1-12).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론 이슈는 마치 과거 한국의 다미선교회를 연상케 합니다. 당시 다미선교회는 1998년 10월 28일에 휴거가일어난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떠들석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곧 휴거가 있을 것이기에 전세금을 빼고 집을 팔고 가산을 정리하여 기도원에 모여 휴거의 때를 기다렸지만 결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 교회는 미숙한 신앙에 의한 오해와 교회 내의 갈등 정도였지만, 다미선교회는 이단이라는 차이점은 있습니다. 그러나종말론의 해석과 신앙의 미숙함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게으름의 문제]

종말론에 대한 오해와 신화적 해석에 의해 야기된 게으름의 경우 3장 6-12절에서 바울은 강하게 일침을 주고 있습니다. 

 

[짧은 생각]

종말을 대하는 건강한 신앙인은 세상을 떠나서 사는 삶이 아니라, 언제 오실 지 모를 마라나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되 지금 우리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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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 너희 삶을 흠 없이 보전하라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수도로서 그리스 최대 항구도시이자 상업도시 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유명한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라는 군사 도로가 지나는 도시였습니다.

유럽 첫 도시 빌립보와는 달리 데살로니가에는 회당이 있었기 때문에 회당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약 3주간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7:1-2). 

 

[순회철학자 VS. 바울]

상업도시 고린도와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지역도 다양한 철학을 설파하는 순회철학자들의 활동이 많았습니다. 바울도 순회철학자들과 같은 형태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순회철학자들은 짧은 기간 동안 머물면서 철학을 설파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곤 했는데, 고린도나 에베소 전도와는 달리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3주 정도 밖에 머물지 못하고 베뢰아로 피신했기 때문입니다(행 17:5-10).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는 그것에 대해 변론하고 있습니다. 

 

[종교 이슈들]

데살로니가서의 배경은 종교 이슈가 중요한 주제로 다뤄집니다. 

사도행전 17장 6-9절에서는 2차 전도여행 중인 바울 일행을 시기하던 유대인들로부터 소동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그들이 주장한 프레임은 황제 숭배 사상(종교)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한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행 17:6-9). 

더욱이 바울팀이 데살로니가 전도여행을 한 시기는 AD 50~52여 년 경으로, 49년에 있었던 글라우디오 칙령(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충돌로 인한 로마 추방령)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였기 때문에(행 15장)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로마로부터 전해졌을 때입니다. 

 

한편 데살로니가에는 오시리스, 세라피스, 이시스, 그리고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 신전도 있었고(음란 문제 등), 카비루스라고 하는 지역신도 있었습니다. 카비루스 신의 경우, 형제들에게 살해된 카비루스라는 과거의 인물이 때가 되면 부활하여 돌아온다는 신화인데, 혹자는 예수님의 부활 및 재림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져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비교적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다고도 합니다. 

이 신화와 관련하여 4장 11절의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4장 13절부터 5장 11절까지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오해가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카비루스 신화에 근거해서 교회 내에서 노골적으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책임지길 원하거나, 이미 죽은 사람들의 육체의 부활은 어떻게 되는 지도 카비루스 신화와 비교해서 헷갈려 할 만 했을 겁니다. 

 

[짧은 생각 : 샤머니즘과 성공주의 문화]

우리 나라도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같이 과거 우리를 지배했던 종교인 샤머니즘이나 유교 및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 복을 구하는 문제나, 입신양명과 같은 성공주의적 태도 등의 문제에 있어서 그 균형을 잃어버리기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이든 급성장하면 다소 내실이 부족한 것은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개선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건물 크기와 성도 수에 따라 담임목사님의 어깨 너비와 목회자 계급이 결정되는 등 교회에 깊게 뿌리내린 성공주의나 샤머니즘을 걷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종교와 문화에 묶여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강조합니다. 그리고 거룩하고 흠 없이 견고하게 서라고 말합니다(살전 5:23). 

우리도 계속해서 몸에 베인 과거의 흙을 더 털어 내고, 오염된 신앙관을 말씀의 다림줄을 통해서 걷어내고, 거룩하고 흠 없이 구별된 자들로 자라나는 '순전한 기독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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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 만물의 으뜸 Jesus Christ

에베소 지역에서 160km 가량 동쪽에 위치한 골로새 지역은 수리아로 가는 무역로에 위치한 교통 요충지이자 동서를 잇는 교량지였습니다. 

 

[문화적 사상 : 혼합종교/이단 사상]

골로새서에서 전해지는 골로새의 가장 큰 특징은 ‘종교 혼합주의’ 입니다. 

그 중 하나가 성경에서 종종 언급되는 영지주의(Gnosticism)인데, 이는 헬라 철학과 동방의 신비주의 그리고 유대 율법주의가 결합된 형태의 이원론 중 하나로, 신으로부터 내려온 ‘지식’을 얻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뿌리 깊은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와 주변에 만연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욕주의, 자연숭배, 플라톤의 이원론, 우주적 이원론, 축제 때 열정적 엑스터시를 추구하는 키벨레(Cybele) 지역신,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미드라(Mithra) 신과 같은 신비 종교가 그 주변에 가득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혼합종교]

본문에 나타나는 혼합종교를 살펴보면, 

2장 8절에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을 세상의 초등학문에 비유하는데 이는 유대주의를 말하며, 2장 20-23절에서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은 금욕주의 입니다. 

2장 16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은 구원이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율법주의/유대주의입니다. 그리고 2장 11-15에는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할례파도 나옵니다. 

2장 22-23절에는 금욕주의와 우상숭배와 신비주의 종류가 언급되고 있으며, 

2장 18절에는 천사 숭배 사상도 나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로마 지배 하에 있는 모든 지역은 로마황제 자신이 공포한 ‘황제 숭배 사상’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자가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당시에는 무종교인은 있을 수 없었고,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다양한 혼합종교를 가질 수 밖에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동서가 만나는 무역 교차 지역인 골로새는 조금 더 다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제: 만물의 으뜸]

골로새서는 이러한 다양한 다신주의 사상의 지역에서, 진정 만물의 주인이 누구이며 만물의 으뜸이 누구이며 창조주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이어서 예수가 만물의 으뜸이 된 근거로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18-22). 

 

[짧은 생각 : 탐심]

우리도 마찬가지로 혼합종교를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는 ‘탐심’도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심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낳은 소비주의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거나 혹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반복해서 소유하도록 더욱 우리의 탐심을최대치로 자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병들고, 지금은 우리가 사는 지구도 병들고 있습니다. 

 

혼합종교가 팽배했던 골로새에 전해졌던 골로새서는 오늘 우리가 다시 정독하며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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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 천국에서 배달 온 기쁨

[유럽 첫 선교지]

빌립보는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에 터키 트로이(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아시아에서 전하던 복음을 유럽으로 전환한 후의 첫유럽 선교 도시입니다(행 16:6-10). 오늘날을 돌아보면 그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얼마나 커졌는지 당시의 바울 전도팀은 아마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복음의 진전입니다. 

 

[유럽 첫 신자 루디아]

사도행전에서 전해지는 유럽의 첫 기독교인은 루디아라는 부유한 여성 상업인이었습니다(행 16:11-15). 당시 자색 옷감 장사는 황제와 귀족만을 상대하는 장사였기 때문에 이윤이 컸습니다. 그래서 빌립보는 바울의 전도여행 내내 물질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빌 4:15-18; 고후 11:8-9). 빌립보서는 감옥에 갇힌 자신에 대한 변증 외에도 그들의 신실한 재정 후원에 감사하는 바울의 마음도 담겨있습니다(빌 4:18). 물론 재정 후원외에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팀을 위한 중보기도와 마음의 후원도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애정을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무명의 에바브로디도]

이번에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사람은 무명에 가까운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는 빌립보의 소식과 재정 후원금을 가지고바울에게 전해주었던 사람이며(빌 4:18), 바울과 함께 수고하고 군사되고 바울팀의 쓸 것을 도운 사람입니다(2:25).

그러나 그렇게 그리스도의 일을 돕다가 병들어 거의 죽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빌립보 교회를 간절히 그리워 하였고, 그런 중에도 자신의 병든 소식을 듣게 된 빌립보 교회를 염려할 만큼 이타적이고 교회를 사랑하는사람이었습니다(2:26).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회복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2:27).

 

바울팀과 에바브로디도 그리고 빌립보 교회가 서로 함께 동역함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그러다가 에바브로디도가 병을 얻게 되어 가슴이 아프고, 후에 그가 병에서 낫게 되어 저 또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지만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그런 분들을 응원하고 위로하고 기도해 봅니다.

 

[빌립보 지역]

빌립보는 금과 수원지로 풍요한 도시였으며, 마게도냐의 빌립2세가 점령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 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42년 경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그들의 편을 들었던 빌립보 지역에 로마의 퇴역 군인을 위한 식민지로 지정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 식민지는 로마를 상징하는 지위와 영예가 부여되었으며, 특별히 퇴역군인들에게는목숨을 바친 보상으로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민권]

당시 로마 시민권은 권력이자 사회적으로 보장되는 강력한 지위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로마 투표권이 주어졌고, 십자가 처형이나 채찍질과 같은 형벌이 면제되었으며, 바울의 경우 사도행전에서 부당한 처벌에 대한 상소를 로마에 직접 재기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막강한 권리였습니다. 

빌립보는 그러한 시민권의 권리를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러한 시민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민권 지위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 시민권은 로마 시민권보다 더 우월하고 영원하고,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으며,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곳이라고 말합니다(빌 3:20-21). 

로마 시민권의 막강한 권리를 체감하고 있던 당시 사람들이 하늘 시민권 얘기를 들었을 때에 얼마나 피부와 와 닿았을지를 상상해봅니다. 

 

[옥중에서 말하는 역설 : 기쁨]

사실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에 가이사랴 감옥에서 로마로 호송된 후에 여전히 로마 감옥(가택연금 형태)에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 밖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에서 기쁨이라는 단어는 7번이나 사용됩니다(1:18; 2:17, 18, 28; 3:1; 4:4 10). 바울이 말한 기쁨은 기독교의 비밀이자 역설입니다. 

 

당시 빌립보와 주변 지역에서는 바울의 매임 즉 감옥에 갇힌 문제를 가지고 그를 깎아 내리거나 그들이 전해들은 복음이 로마 정부에 의해 제한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흉흉한 얘기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빌 1:14-17). 

오늘날에도 “교회다니면 일이 잘 풀려야지”, “사역자와 선교사라면 모든 것이 잘 풀려야지”라고 하는 인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그에게는 자신의 매임도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로 인해 복음이 확장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 겸손]

그리고 2장에서 다시 한 번 놀라운 기독교의 역설을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오늘날 2장 5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더 중요한 메시지는 6절 이하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지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즉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본래 십자가에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겸손입니다.

듣기 불편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종한 결과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셨느니라”(빌 2:9-11). 

 

우리는 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 주목과 박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높여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높여 줄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복음, 천국 시민권,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그래서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기뻐할 수 있는 저희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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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 Be the Church, 날마다 교회 되는 삶

에베소 지역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에 3년 머물렀던 곳으로, 1~3차 전도여행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사역했던 곳입니다. 

 

[아데미 신전]

오늘날 에베소와 관련되어 가장 유명한 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입니다. 아데미 신전은 고대에 가장 웅장한 신전의 하나로 파르테논 신전 넓이의 4배에 달합니다. 당시 아데미 신전에서는 매년 한 달 여간 축제가 열렸는데 이 때에 소아시아에서 수십만의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하니 경제적으로는 큰 대목이요 문화적으로도 그 지역에 매우 큰 영향력을 끼쳤을 겁니다. 

그런데 아데미 여신이 풍요와 생식의 여신인 만큼, 축제(제사)의 최고조는 여사제와 남자 창기의 성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니 당시 에베소 지역 또한 ‘고린도’가 음란함으로 유명했던 것과 마찬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에베소서에 음란의 문제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고린도와는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거나 혹은 저자인 바울이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자 했거나 혹은 회람서신의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남겨진 기록 중에 사도행전 19장은 당시 에베소 상황에 대해 우리에게 도움을 전해줍니다. 

 

[에베소 소동]

사도행전 19장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일어난 대 소동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 지역에는 아데미 신상을 제작하던 은장이들이 많았는데, 기존에 아데미 신상 제작을 통한 수입으로 큰 돈을 벌고 있었는데 바울이라는 사람과 그 일행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각종 이적을 행하며 큰 영향력을 행하했기에 그들의 생계가 끊기게 될 위협이 있었습니다(19:24~26).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과 보물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업 때문에 큰 소요를 일으켰으나, 결국 소동은 불법 집회로 간주되고 일단락 되었습니다(19:40~41). 

이러한 대 소동은 전조 증상이 있었는데, 바울의 손을 통한 이적(19:11), 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가면 병이 낫고 악귀나 떠나는 이적(19:12), 그리고 마술사들 조차 바울의 이적이 부러워서 따라하거나 오히려 역풍을 맞는 사건과 마술 관련 서적을 모두 불태운 사건들이 있는 등(19:13~19) 당시 문화 기류를 흔들만한 사건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참고로 후에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아데미 신전과 관련된 여성의 옷차림과 같은 문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짧은 생각]

에베소교회는 아데미 신전의 영향력을 뚫고 복음이 충만하게 이르렀으며 오늘날 터키인 온 아시아에 복음이 퍼졌습니다(행 19:26). 

오늘날 주께서도 각 교회마다 적당한 헌신자보다 사도바울과 같이 완전한 헌신자를 찾고 계신 듯 합니다. 

 

[회람서신 / 구성과 내용]

에베소서는 회람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베소교회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회람되며 이방인과 유대인이 섞여있는 교회에서 모두가 하나되기를 얘기하고, 하나됨의 근거로 소위 ‘교회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전반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면(엡 1~3장), 후반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엡 4~6장). 

 

[짧은 묵상]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거기서 머무르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까지 나아가길 바라고,

사랑을 경험했다면 때로는 내 고집을 꺾고 그 사랑을 전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교회 가는 종교인이 아니라, 교회 되는 즉 날마다 예수님과 더불어 교회로 지어져 가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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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다른 복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떠난 오늘날 터키의 갈라디아 지역에 ‘또 다른 복음’(1:6-9)을 전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각자의 생각은 여러 가지 일 수는 있고 또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선한 태도이지만, 예수께서 전해주신 복음은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주께서 전해주신 복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유대 절기를 지켜야 하며 특히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은 필요충분 조건이 되지 못하며, 율법과 할례가 합쳐져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구원의 필요충분 조건]

4장 10절에 나오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는 유대 전통 절기를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며, 

6장 13절에 나오는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는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받아야 함을 말하는 동시에, 그로 인해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그렇게 주장했던 또 다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고 있는 박해를 모면하고자 권모술수를 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6:12). 

 

[초등교사/초등학문] 

바울은 할례와 율법이 구원의 필요충분 조건이 아님을 논증하기 위해 구약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독특한 단어 사용이 주목됩니다. 

바로 초등교사 혹은 초등학문이라는 단어로, 원어로는 “파이다고고스”입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는 노예들 중에 주인의 자녀들을 환경적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하고, 학교 등하교도 안전하게 책임지는 노예들이 있었는데, 이런 이들이 바로 파이다고고스를 의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갈라디아 교회공동체 사람들이 단어를 듣게 되었을 때에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제한적인 ‘안내자’ 및 ‘보호자’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믿음과 구원에 있어서 그 효용성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한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하고 완전하신 보호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에 이르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종 노릇 vs. 사랑의 종 노릇]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고 말합니다. 복음은 할례와 율법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미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와 같이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강조했던 바울이 5장 13절에 가서는 또 다시 “종 노릇”하라고 얘기하고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일까요?

율법의 종 노릇이 아니라 바로 사랑의 종 노릇, 성령의 종 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종 노릇의 역설이자 진리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메야 할 영원한 종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오히려 모든 인류의 종 노릇을 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종 노릇, 사랑의 종 노릇, 그리고 성령의 종 노릇입니다. 

 

이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해져서 종의 멍에에서 벗어났다면, 오늘 십자가와 사랑과 성령의 종 노릇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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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 내 심복으로부터 배반당할 때의 태도

살다 보면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빗발치는 오해들을 감내해야 한다거나, 내가 지극적성으로 도와준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하기도 합니다.

 

바울을 뒤흔든 공격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그러했습니다. 지극정성으로 목회하던 교회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일어나 바울을 공격하고 깎아 내리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내용인 즉, 바울의 글에는 무게감은 있지만 말주변이 변변치 못하고 강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10:10). 

 

외모 중시 사상

당시에는 문화적으로 신적인 성품이 외모로 드러난다고 인식했고, 수사학과 웅변에 뛰어나야 인정받는 사회였는데 바울은 그러하지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과거 바울이 대제사장들의 추천서를 받아 스데반 등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압장섰던 이력은 더욱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추천서

게다가 예루살렘의 권위 있는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검증된 ‘추천장’(3:1-3)을 가지고 온 몇몇 유력 인사들도 바울을 공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총체적으로 그의 사도성 자체까지 의심받게 된 상황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음을 천명했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의 소명 자체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는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순회철학자 문화

심지어 생계유지를 헌금을 받아 사용하지 않고 텐트메이커로서 자신이 벌어서 생활비를 쓰는 것도 오히려 평가절하 되고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상황이었습니다(11:7-15).

당시는 순회철학자들이 유행했습니다. 그들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고 다니며 일종의 강의료를 받곤 했는데, 바울은 순회철학자들의 형태로 전도를 하면서도 당연히 받아야 할 강의료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후원도 받지 않았는데, 이러한 문제까지 종합적으로 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11:5-7). 

 

바울이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오늘날의 왕따 문화의 고통을 넘어서는 고통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질그릇에 담긴 보배(4:1, 7) 논리로 사도권을 변증하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논리(11-12장)로 이어려움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실로 놀라운 신앙의 태도이고, 복음의 진수를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끼던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뭉개지고 배반당하고 공격받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장점과 치적과 공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연약함 즉 옥에 갇히고 매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태장 맞고 돌 맞고 파선하고 사람들의 위협과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던 자신의 고난을 자랑하고(11:23-28), 결정적으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사도권 변증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생각해보기]

오늘날 누구나 질그릇보다는 더 좋은 그릇을 택하기 원합니다. 

좋은 측면에서 보면 자신이 중요하게 사용되길 원하는 것이고, 안좋은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질그릇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보다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디도를 통해 중간에 전해온 소식은 배반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것이었습니다(7:6-16). 

바울은 자신을 드러내는 자랑과 화려한 변론을 택하지 않고, 연약한 질그릇을 택했기에 하나님이 그를 택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을 통해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고린도후서를 통해 하늘 나라의 비밀을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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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 고린도의 봄날

고대 부유했던 도시 고린도는 로마에게 멸망 당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시저(Caesar) 황제에 의해 재건된 도시이며,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 의해 아가야 지역의 수도가 된 후에 사도바울이 그 땅을 밟게 됩니다. 

 

에베소서에 등장하는 에베소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린도는 유명한 항구도시이자 무역과 상업이 성행하는 도시였기에 다양한 문화와 각 나라 사람들이 서로 교차되는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유흥과 쾌락이 발달한 죄악의 도시로 유명했고, 심지어 고린도를 뜻하는 어원 중에 “Corinthian”이라는 단어는 창기 혹은 난봉꾼이라는 뜻인데 이러한 단어가 생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고린도 지역이 얼마나 음란한 도시였는지 짐작됩니다. 

그래서인지 고린도전서 5장은 근친상간의 문제가, 6장에서는 성적인 부도덕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얘기로 가득합니다. 

 

고린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아름다움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일 것입니다. 2세기 기록가들에 따르면 아프로디테의 신전 창기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고도 말합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일거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고린도가 그만큼 성적인 문란함과 음행이 컸던 지역이며, 그것이 합법적이고도 당연한 종교 행위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 신전 창기들도 회심하여 교회에 들어와서 예배드리는 경우가 생겼을 것인데, 오늘날 대형교회와 달리, 50명 내외로 파악되는 당시 가정교회에서 그들은 분명 눈에 띄는 사람들이었고, 문화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그들의 존재는 충격이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차별하거나 싸움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개종한 신전 사제들은 매우 짧은 머리나 민머리가 특징이었는데, 그래서 교회의 경건한 여인들은 의도적으로 긴머리를 하거나 머리에 수건을 쓰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11장에서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문제에 대해서 지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편 당시 고린도 지역에 있었던 신전만 해도 20여개가 넘는 신전 터가 현재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우상에 바쳐진 고기” 문제의 원인이 되었습니다(고전 8:1~). 왜냐하면 당시 시장에 나온 거의 모든 고기는 이방 신전에 바쳐진 후 시장에서 거래되는 부정한 고기였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이것을 먹어도 되느냐 마느냐가 신앙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8~10장).

 

이 외에도 고린도전서는 분파의 문제(1~4장), 송사 문제(6장), 부부관계나 결혼 문제(7장), 그리고 매우 유명한 은사의 문제(12~14장)를 다루는 등 매우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어서, 하나의 주제로 통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교인들이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와 교회의 상황을 전해준 것(16:17)에 대한 답변들이 주요 내용이었기에, 일종의 옴니버스 답변 방식의 서신서로 보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짧은 묵상]

생각해보면, 성령하나님은 고린도와 같은 어떤 척박한 땅도, 저마다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무리 짓는 강력한 지역도, 또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애물을 뚫고 당신의 사역을 하시는 최고의 사역자이십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오래 있었던 저와 같은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척박한 땅을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새삼 나를 인내하고 참아주시는 하나님을 존경하고, 더 사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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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배경과 적용

[배경]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스페인(서바나)으로 마지막 선교를 가기 전, 로마 교회에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교제하고, 자신이 펀드레이징한 큰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받아줄 것과 마지막 소명이라고 여겼던 땅 끝 선교에 삶을 바치기 위해 중보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후 바울은 결국 가이사랴 감옥에 갇히고, 죄수의 신분으로 유라굴라 광풍의 역경을 뚫고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전도하다가 나중에는 주 앞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로마서는 그 배경이 되는 중요한 사건을 알아야 잘 풀립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 교회 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심각한 갈등과 소동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49년에 로마의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지역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다는 칙령을 내리게 된 사건입니다.  

칙령이 발효되고 수 년이 지나 황제 칙령의 효력이 사라진 후,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은 로마 교회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부푼 꿈과 기대감을 가지고 귀환했는데, 막상 로마 교회에 돌아와 보니 회당과 가정교회 등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모두 이방인들이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등 자신들이 하던 모든 역할을 이제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율법 해석에 있어서도 매번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 되라는 메시지가 바로 로마서의 많은 부분에 담겨있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복음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핵심 교의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장부터 계속해서 이방인, 유대인, 그리고 모두에게 번갈아 가면서(혹은 섞어서) 믿음과 하나님의 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유대인에게는 아브라함이 할례 이전에 의롭다 칭함 받았다는 것을 얘기함으로 유대인들이 더이상 할례를 구원의 필요충분 조건으로 내세우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복음에 외인이었던 이방인들이 돌감람나무인 유대인에게 접붙임 받은 것이니 감사하고 겸손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적용]

교회에서 하나될 수 없는 이유는 많습니다. 내가 성경을 더 잘 알아서 하나될 수 없고, 그냥 싫어서 하나될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합리적인 이유를 꺾고, 모든 호불호를 바꾸어서, 언제나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한 형제자매 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어울려서 하나 되고,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하나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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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 우리의 능력을 내려놓자

[1] 신약에서의 위치: 신약의 역사서

구약성경의 역사적 기준과 서사의 줄기를 제시하는 책은 열왕기서라고 한다면, 신약성경에서는 그 역할을 사도행전이 담당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할 때 구약은 열왕기를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배열시키고, 신약은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배열시키고 큰 그림부터 보면 도움이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실제로 언급되고 있는 사건들이 역사에서 증명되는 여러 단서가 있는데 그 내용 몇 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1장  27-30절의 예루살렘 기근 사건은 역사적으로 46년에, 12장의 야고보의 순교 사건은 44년에, 18장 2절의 글라우디오 황제 칙령은 49년에, 그리고 18장 12-17절의 바울 갈리오 호송 사건은 50~51년에 실제로 일어난 것이 증명되는 사건들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서사를 중심으로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기술되는 중요한 초대교회의 이야기들을 통해 신약성경들을 한 줄기로 꾀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2] 사도행전의 구조

여러 가지 사도행전의 구조 중 2가지에 주목해 봅니다. 

첫째는 지리적 확장의 3중 구조입니다. 

사도행전의 핵심 구절 중 하나는 1장 8절 말씀으로 성령, 권능, 그리고 복음의 지리적 확산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을 쓴 누가의 후속편으로서, 갈릴리에서 시작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마무리 된 것이 누가복음이라면,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는 복음의 확산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지리적 순서를 겹치면 마치 데칼코마니와도 같습니다. 

한편 복음의 확산이라는 주제는 6개의 요약문 즉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고, 흥왕하고, 그 무리의 수가 많아진다”라는 등의 6차례의 요약적 진술이 복음이 확장될 때마다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있기에 6중 구조로 보기도 합니다(6:7; 9:31; 12:24; 16:5; 19:20; 28:31). 

 

둘째는 주인공의 2중 구조입니다. 

사도행전 초반인 1~8장의 주인공은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9~12장에서 사울과의 오버랩 과정을 거친 후 13장부터 마지막장까지는 이방인의 사도로 택함 받은 바울이 주인공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방인이 이방인에게 쓰여진 책이기에 본 구조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이적들은 사도행전에서 주인공이 되는 베드로와 바울에게서 병행되어 나타나고 있음이 포착됩니다. 자세히 보면 꽤 의도적이고도 치밀하게 병행되고 있는데, 그 중 우리가 잘 알듯이 누가복음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사건이, 사도행전에서도 병행되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렸고(9:36-42) 바울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 하는 청년을 살렸습니다(20:8-12). 이는 누가복음의 '예수행전'이 사도행전에서도 연속되고 있다는 것의 단면이며, 베드로와 바울이 바로 예수님의 뒤를 잇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듯 사도행전의 실제 주인공은 베드로도 아니고 바울도 아니라,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문화적, 지리적, 신학적 장벽을 만날 때마다 그 장벽을 넘게 하는 분은 사람들이 아닌 성령님이셨기 때문입니다. 

[3] 주제/생각할 점

1. 우리를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

 :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가 성령님의 주도 하에 우리 인간을 통해 어떻게 전파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도 성령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뒤를 이어갈 것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2.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성령님

 : 오늘날 교회의 주인은 저와 같은 목회자도 아니고 성도도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직 성령하나님이 교회와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도록 우리는 그저 그분께 길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3. 우리 경험과 능력보다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권능

 : 사도행전 1장 8절에서와 같이 우리가 오직 성령을 의지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권능을 힘 입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목회자도 그렇고 성도들도 좋은 스펙과 좋은 능력이 더 요해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능력과 경력을 사용하기 쉬운 세상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 사용되기 보다는 성령의 능력을 덧 입을 수 있도록 더욱 주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권능으로 인해 우리 주변과 이웃과 일터와 사교모임과 모든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나의 능력이 아닌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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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
Fujifilm 35mm f2 lens for Fujifilm x-mou

​성경에 귀 기울이다 : 건강한 성경해석의 렌즈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의 정신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이 아닌 율법 자체만을 강조한다면 율법주의가 될 것이고, 율법의 정신까지 모두 부인한다면 율법폐기론자가 될 것입니다. 

모든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과할 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안전한 해석이 됩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과거 안식일의 새로운 개념의 주일에 노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등에 관한 논란이 간혹 있는 것을 봅니다. 

성경을 보면, 육식의 경우 처음에는 허용되지 않다가 노아 홍수 이후에는 허락되었으며, 돼지와 같은 동물의 경우 레위기 11장에서 부정한 음식으로 규정하였으나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 이후로 허락된 음식입니다(사도행전 10-11장). 이러한 음식 문제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관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은 복음서에 꽤 많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약의 문제들에 대한 해석은 신약이라는 렌즈, 더 정확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해석학적 렌즈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설은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모세오경의 율법을 613개의 조항을 분류합니다. 아퀴나스는 모세오경을 의식법과 시민법과 도덕법으로 분류하여, <의식법>은 제사와 성결에 관한 법, <시민법>은 형법과 민법과 같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는 법, 그리고 <도덕법>은 십계명의 근본 정신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의식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구약의 제사법은 신약시대에 와서 인간의 죄에 대한 댓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재물이 되심으로서 모두 해결하셨기 때문에, 오늘날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들입니다. 의식법 중 베드로와 고넬료 사건으로 대표되는 음식법(부정한 음식)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폐하셨음을 사도행전 10-11장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의 태도와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시민법은 각 시대와 국가별 특징이 반영되는 성질이라는 점에서, 국가와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도덕법의 경우에는 간단히 요약하면 십계명의 정신,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핵심 계명이기에 그 계명과 정신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모두를 볼 수 있어야 하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볼 때에 건강한 성경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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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귀 기울이다 : 구약의 '인과응보' 신앙 넘어서기

구약성경은 족장시대의 두 개의 트랙을 통해, 우리에게 축복과 고난이라는 이중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아브라함은 축복의 상징이고, 욥은 고난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신명기와 민수기의 '축복과 저주'의 메시지 즉 순종하면 축복 불순종하는 저주라는 신명기 역사관의 메시지만을 놓고 보면, 선교사님의 교통사고나 사역자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고, 욥의 고난도 신약의 스데반이나 제자들의 순교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이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욥의 메시지가 필요한 이유이자 근거입니다. 물론 신약은 예수께서 그리고 서신서의 많은 부분에서 고난에 대한 메시지를 명확히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인과응보적 신앙, 즉 아브라함의 축복 모델만을 의지한 나머지, 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멀리했습니다. 그들은 죄의 결과로 아픈 것이고 죄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아브라함 축복 모델 만큼 욥의 고난에 대한 무게감을 소홀히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오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죄의 결과가 곧 질병과 가난과 직결되지 않음을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해석을 책망하셨듯이, 오늘날 우리도 축복과 고난 모두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만 우리 인생의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로 이양하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구약의 축복과 고난의 주제는 신약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 지고 있음을 각자가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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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 속건제를 통해 보는 현대 교회

레위기 5장 14절에서 6장 7절은 속건제를 설명합니다.

레위기 제사의 종류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가 있는데, 속건제는 보통 배상에 관한 제사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약 누군가의 물건을 훔치거나 피해를 끼치게 했을 때에도 제사를 통해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 때 속건제가 완료되기 위해서는 제사 외에도 피해를 입은 이웃 소유물의 20%를 중과 배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이런 법이 생겼을까요? 크게 보면 공동체와 이웃을 지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작게 보면 타인과 그들의 재산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현대 교회가 과거 처럼 제사를 드리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이웃과 공동체를 존중하고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밖의 이웃과 공동체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는 잘하고 있을 수는 있겠지만, 어쩌다가 우리는 우리 이웃과 세상 공동체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에 충실해서 받는 손가락질이 아니라, 더 부정직함으로, 권력 세습과 부자 세습으로, 목회자의 부도덕함으로, 교회의 배타성이 너무 강해서 손가락질 받고 있음이 우리의 뼈아픈 현실입니다. 

레위기의 속건제의 정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존중과 섬김은 교회에서만  하고 교회건물과 교회공동체를 벗어나는 순간 사라지는 영성, 그래서 가정공동체와 일터공동체 그리고 동네 이웃과 약자에게는 사라지고 마는 우리의 이원화된 존중과 섬김의 양면성을 돌아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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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귀 기울이다 : 성경 구성 요약 편

율법서는 신앙인으로서의 가이드를 줍니다.

역사서는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참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는 알람을 줍니다.

시가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노래하는 가르침을 줍니다.

선지서는 순종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라는 화살표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신약은 인류의 십자가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다시오심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책이며,

영생의 말씀을 섭취하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가이드이자, 알람이자, 가르침이자, 화살표이자, 십자가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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